책을 위한 책, 음악을 위한 음악? Books about Books, Music for Music?

나는 책을 좋아한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독서’를 좋아한다고 하는 편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네덜란드에 살다 보니 한국 책을 손에 넣을 방법이 거의 전자책뿐이라 늘 이북으로 읽는다. 사실 읽을 수만 있다면 종이든 화면이든 상관없다. 다만 전자책은 검색이 용이하고, 필요한 구절을 쉽게 복사할 수 있으며, 이북 리더 하나면 수백 권의 책을 들고 다닐 수 있으니 꽤 실용적이다.

물론 실물책이 주는 즐거움도 있다. 책장을 넘기는 촉감, 종이 냄새, 즉석에서 메모를 하거나 포스트잇을 붙이는 행위. 하지만 나는 로맨티스트라기보다는 실용주의자에 가까운지도 모른다. 실물책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 걸 보면 그렇다.

독서에서 가장 큰 재미는 책을 고르는 일이다. 이 과정이 중요한 이유는, 이 선택이 앞으로 며칠 동안의 내 독서 시간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좋은 책을 만나면 그 책을 읽는 2–3일간(대략 300페이지 기준) 내 태도조차 책의 영향을 받는다. 우울한 책을 읽으면 나도 조금 우울해지고, 흥미로운 책을 읽으면 독서에 더 몰입하게 된다. 결국 “다음에 어떤 책을 읽을까?”라는 선택은 늘 즐겁지만 힘든 일이다.

나에게 정해진 독서 시간도 있다. 하루 중 반드시 지키는 두 시간은 오전 7시와 저녁 9시 30분이다. 아침에 눈뜨자마자, 그리고 잠자리에 들기 전이다. 아침 독서는 전공과 관련된 공부를 위한 시간이다. 노트를 펼쳐놓고 45분 동안 5–7쪽 정도를 아주 천천히 읽으며, 요약을 남기고 중요한 구문을 옮겨 적는다. 아침을 택한 이유는 이 시간대의 의지가 강하고, 이런 책들은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저녁에는 정말 읽고 싶은 책을 읽는다.

또 하나, 나는 독서 편력이 없다.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읽는다. 소설, 역사, 과학, SF, 자기계발, 추리, 인문… 장르를 막론하고 다 좋아한다. 그중에서도 특히 좋아하는 장르는 ‘책 에세이’다.

책 에세이를 좋아하는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 실용적인 이유로, 많은 책들을 소개해 주기 때문이다. 저자가 애착을 가진 책이 등장하곤 하는데, 그런 책은 대체로 매력이 크다.
둘째, 작가의 소소한 평가 속에서 책을 대하는 태도를 배우거나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시각을 만날 수 있다. 에세이 속 저자와 책이 교감하는 방식을 엿보며, 그것을 나의 방식과 비교하는 즐거움도 있다.
셋째, 독서가 느슨해질 때 책 에세이는 다시 책을 사랑하게 만든다. 책에 대한 열정이 담겨 있기 때문에, 한두 권만 읽어도 몇 달간의 독서 열정을 불러일으킨다. 좋은 책을 읽으면 소개하고 싶어진다. 그 욕구는 단순히 아까워서가 아니라, 책에 대한 대화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다. 독서 에세이는 그 대화의 갈증을 해소해 준다.

Italo Calvino 책 표지
Italo Calvino Book Cover

내가 즐겨 읽은 책 몇 권을 소개하자면:

  • Alberto Manguel – A History of Reading (독서의 역사), A Reader on Reading (책 읽는 사람들): 독서 행위 자체를 깊이 탐구하며 여러 책을 엮어낸 글쓰기 / 독서의 즐거움과 위안에 관한 39편의 글.
  • Italo Calvino – Why Read the Classics? (왜 고전을 읽는가): 고전을 읽는다는 것의 의미와 즐거움, 필요성을 구체적인 책들을 통해 풀어낸다.
  • 이동진 – 『밤은 책이다』: 따뜻한 어조로 70권이 넘는 책들을 소개. 특히 밤에 읽기 좋은 책들을 모았는데, 사실은 이동진의 글 자체가 좋다.
  • 유시민 – 『청춘의 독서』: 젊은 시절 읽었던 책들을 다시 돌아보며 쓴 글. 정치적 색채 때문에 읽는 내내 불편하기도 했지만, 책에 대한 관점은 여전히 흥미롭다.
  • Umberto Eco – Confessions of a Young Novelist, On Literature: 자신이 읽고 해석한 책들을 매개로 문학과 독서에 대해 사유한 글 모음.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책을 위한 책이 있다면, 음악을 위한 음악도 있지 않을까? 음악사 속에서 수없이 만들어진 변주곡이나 오마주, 리믹스 같은 것들이 바로 그런 예일 것이다. 이미 존재하는 음악을 다시 불러내고, 그 위에 자기만의 언어를 덧붙여 또 다른 음악을 만든다. 하나의 텍스트를 읽고 다시 글을 쓰듯, 음악은 음악을 다시 읽어내며 새로운 음악으로 태어난다. 그 가운데 가장 에세이적인 음악은 아마도 “원작을 비틀면서도, 결국은 다시 원작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음악”일 것이다. 단순한 차용이 아니라 자기 해석이 깊숙이 배어 있어, 듣는 이로 하여금 “그럼 원래 곡은 어땠을까?” 하고 궁금해지게 만드는 음악. 결국 원작과 새로운 해석 사이를 오가며, 청자를 흔드는 음악이다.

또 한편으로는, ‘듣기’라는 행위 자체를 탐구하는 음악도 있다. 존 케이지의 4’33”은 연주 대신 침묵 속에서 모든 소리를 듣게 함으로써 “음악은 소리가 아니라 듣기다”라는 사실을 드러냈다. 폴린 올리베로스의 Deep Listening은 ‘듣는 법’ 그 자체를 음악으로 삼았다. 이런 작품들을 떠올리면, 음악을 위한 음악이란 단순히 소리를 다시 쓰는 것이 아니라 음악을 어떻게 경험하고 해석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독서를 하든, 음악을 듣고 만들든, 우리는 결국 우리 과거의 경험 위에서 움직인다. 에세이나 변주곡은 그 경험을 아주 구체적이고 창의적인 방식으로 드러내며, 작가와 연결되는 행위일 것이다. 어쩌면 내가 독서 에세이를 사랑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지 모른다. 흥미롭게도, 나는 변주곡이나 리믹스를 그만큼 사랑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차이가 또 재미있다.

‘Buoyants’ in Grotekerk, Veere

헤이그에서 오랫동안 알고 지낸 친한 친구인 Ludmila RodriguesMike Rijnierse가 지난 6월 초 아주 반가운 전화를 해왔다. Zeeland, 내가 그때까지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곳에 있는 아주 오래되고 흥미로운 교회에서 site-specific installation을 할 예정인데, 사운드를 맡아 달라는 것이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하고는 며칠 후 그들의 스튜디오에서 첫 미팅을 가졌다.

Veere라는 기차도 들어가지 않는 작은 마을에 자리한 Grotekerk(“큰 교회”라는 뜻으로, 네덜란드 도시마다 있는 대표 교회쯤으로 생각하면 된다)에서의 전시였다. Lud가 보여준 프린트물과 웹사이트 속 교회는 구조가 확 트여 있고 전시 공간으로도 운영되는 곳이었다. 실제로 박물관처럼 쓰이며 크고 작은 전시들이 열리고, 매년 Kerkmeester라는 프로젝트를 통해 예술가들이 커미션을 받아 전시를 하는데, 올해는 Lud와 Mike 차례였다. 그들이 말해 준 전시의 컨셉은 Underwater!

최근 예술계에는 환경과 인간 외 존재들에 관한 주제가 많다. 당대의 중요한 문제이기도 하고, 인간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려는 흐름이기도 하다. 학생들도 종종 이런 주제를 다루니 낯설지는 않다. 그러나 내 흥미와는 거리가 있었던 이유는, 물속 환경을 이야기하려면 녹음을 해야 한다는 점 때문이었다. 나는 20년 가까이 전자음악에 몸담으며 단 한 번도 field recording을 해본 적이 없었다.

나는 왜 녹음에 흥미가 없었을까? 흥미로운 소리를 듣고 감동하거나 명상에 잠긴 적은 많지만, 그것을 작품으로 담는 방식은 내 작업 방향성과 달랐다. 다른 예술가들이 만든 field recording 기반의 작품을 듣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이번 프로젝트는 달랐다. “이제 안 해본 것을 해봐야 한다”는 강한 내적 목소리가 있었다. 이런 기회가 아니고서야 내가 뜨거운 햇볕이나 비바람 속에서 몇 시간을 마이크 들고 서 있을 리가 있겠는가.

실제로 최근 나는 다양한 변화를 시도했다. 2024–2025년에는 학교에서 Analog Studio 수업을 청강하며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작품을 써 보기 시작했다. 물론 DIY 세계는 계속 확장 중이지만, 늦기 전에 새로운 것들을 경험해 보고 싶었다. 한 번으로 충분하다면 그걸로 족하지만, 그 과정이 내게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모른다. 그래서 흔쾌히 “YES!”를 외치며 프로젝트에 돌입했다.

Grotekerk Veere
Some notes after the visit

7월 초, 한국에 휴가 가기 전 나는 Lud와 Mike와 함께 Veere를 방문해 내 인생 첫 field recording을 했다. 교회 공간을 둘러보니 동기부여가 폭발했다.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천장이 아주 높다는 점이었다. 우리는 2층에도 스피커를 두었고, 10미터 높이에 8채널(4개의 스테레오 페어), 17미터에는 4개의 스피커를 천장을 향해 배치했다. 옥토포닉이라기보다는 확산(diffusion)에 가까운 구성이었다.

내 상상 속에서 청자들은 물속에 있고, 17미터 위의 스피커는 마치 지상을 상징하는 듯했다.

집에 돌아와서는 수도꼭지, 샤워 등으로 샘플을 만들었고, Open Data Archive에서 과학 목적으로 업로드된 underwater recording들을 다운받았다. 그런데 들으면서 깨달은 것은 우리가 상상하는 “물속 소리”는 사실 미디어가 주입한 이미지라는 점이었다. 실제 소리들은 전혀 다르게 들렸다. 자갈을 긁는 듯하거나 crackle noise generator 같은 노이즈와 어쿠스틱 사운드가 섞여 있었고, 가끔 마이크를 툭툭 치는 듯한 소리가 들어 있어 ‘아, 레코딩이구나’ 하고 느끼게 했다.

그래서 오히려 나는 억지로라도 ‘물’의 이미지를 덧입혀야겠다고 생각했다. 물속 소리와 물 밖의 소리가 함께 모였다.

또 다른 재료는 Analog Studio에서 녹음한 신호들이었다. 단순히 물속 소리를 재현하는 것만으로는 예술적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오히려 듣는 이의 상상력을 열어주고 싶었다. 그래서 synthetic sound들을 더해, 미지의 세계를 미지로 남기고자 했다.

결국 5–10분짜리 작품을 15개나 만들었고, 여름 내내 한국에서 시원한 물소리를 들으며 헤드폰으로 작업했다.


12채널 spatialization은 WFSCollider로 마무리했다. 레이어마다 다른 출력과 믹싱을 적용했고, 일부는 WFSCollider 패턴을 이용해 spatial motion과 sound modification이 일체화되도록 했다. 예컨대 granular한 처리를 하면서 density가 커지면 위치 이동의 편차(deviation)도 커지는 식이었다.

Field Recording

한국에서 돌아온 바로 다음날, 짐을 풀자마자 다시 Veere로 향했다. 시차 적응은 힘들었지만 주로 저녁에만 고생했고, 낮 동안은 mastering을 마무리했다. 걱정했던 17미터의 시간차도, 두 레이어가 뚜렷할 때와 모호할 때가 적절히 섞여 흥미로운 효과를 냈다. 그리고 후반에 추가된 bass shaker 덕분에, 귀를 바닥에 대면 천장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바닥으로 전이되는 듯한 오묘한 효과도 느낄 수 있었다. 볼륨이 낮아도 청중이 온몸으로 소리를 느낄 수 있었다.

@Benjamin van der Spek Mike, Rob, Lud and I from the top left.
@Benjamin van der Spek

설치는 Lud, Mike이 함께 준비했다. 그 둘은 거대한 녹색 천에 핀과 줄을 설치하고 Rob이 만든 모터 인터랙션으로 파도를 만들어내는 장치(위의 이미지)였다. 단순해 보이지만 안정적인 대규모 움직임을 구현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다. 셋다 정말 대단하다. (크레인 타고 17미터까지 올라가는 그런 작업은 나는 절대 못한다!)

음악은 약 두 시간 지속된다. 전시는 10월 26일까지 이어지고, 내년 봄 재오픈 예정이다. 많이 들 가서 보시길!

👉 grotekerkveere.nl

벨소리의 기억, 침묵의 현재 Memories of Ringtones, Silence of the Present


세삼스럽게 무슨 휴대폰에 대한 비판을 하려는 건가 싶겠지만, 2025년 한국을 방문하며 내게 가장 강렬하게 다가온 것을 꼽으라면 첫째로 사람들과 휴대폰의 일체다. 몇 년 전만 해도 휴대폰, 아니 스마트폰 없이도 살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느낀 순간은, 모든 금융 관련 일들이 스마트폰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게 되었을 때였다. (그전에는 PC만으로도 가능했다.) 아마도 이것은 코로나와 함께 찾아온 변화 중 하나였을 것이다.

움베르토 에코의 에세이집 미친 세상을 이해하는 척 하는 방법을 보면, (참고로 에코의 에세이는 정말 너무 유쾌하고 시원하다!) 거의 한 챕터가 휴대폰과 인터넷 비판에 관한 글로 채워져 있다. 쓰여진 시기가 15년도 더 전이라는 걸 생각하면, 만약 그가 지금 살아있다면 이 휴대폰이 지배하는 세상에 대해 어떤 글을 썼을지 궁금하다.

누군가의 입에 핸드폰을 쑤셔 넣는 것은 그 사람의 성기를 잘라내는 것과 비슷하다. 그의 소유물 중에서 가장 내밀하고 개인적인 것을 훼손하는 일이 될 테니까. 그사이 핸드폰은 자연스럽게 우리 육체의 일부가 되었다. 귀의 연장이고, 눈의 연장이고, 심지어 페니스의 연장이기도 하다. 누군가 그의 핸드폰으로 질식시키는 것은 그의 창자로 목을 졸라 죽이는 것이나 진배 없다. <자, 받아, 메시지 왔어!> 하고 말이다. — 2008년 5월 16일

사람들은 휴대폰과 하나가 되어, 그것을 자신의 육체 일부로, 세상과의 연결로, 더 나아가 세상 그 자체로 인식하는 듯했다. 마치 휴대폰이 없는 세상에서는 존재하지 못할 것처럼.

한국에 오면 백화점이나 상점을 둘러보며 변화를 살피곤 하는데, 이제는 모든 새로운 전자제품이 휴대폰과 연결되어야 하고, 가구는 휴대폰 거치대를 품고 있으며, 옷의 디자인마저 휴대폰을 수납할 자리를 고려하는 듯하다. 이런 의미에서 “휴대폰과 인간이 일체되어 간다”는 말은 과장이 아닐 것이다.

내가 가장 힘들어하는 부분은 대화의 상실이다. 여기서 대화란 반드시 언어적 교환만을 뜻하지 않는다. 길을 걸을 때, 차를 마실 때, 어떤 이유로든 서로 눈을 마주쳐야 할 때 생기는 그 짧은 순간들. 나의 손짓과 발걸음을 눈치채는 사회적 창구. 인간이 태어나면서 자연스럽게 배우는 그 사회적 대화가 이제는 단순히 “사라져 간다”는 표현이 무색할 만큼 엉망이 되어가고 있다. 제발… 휴대폰을 보면서 “듣고 있어”라고 하지 말고, 눈을 마주치고 이야기해 달라!

그렇다고 해서 휴대폰이 쓸모없다는 말은 아니다. 내일 당장 모든 사람이 휴대폰을 반납하라고 주장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휴대폰이 가져온 긍정적인 것들—GPS, 알람, 일정 관리, 팟캐스트, 헬스 트래커, 카메라!—은 이제 없이는 살 수 없는 편리함이 되었으니까. 다만 우리는 그 소용돌이에 휩쓸려 들어가면서, 그 속에서 빠져나가고 있는 우리 자신을 얼마나 자각하고 있을까? 우리가 놓치고 있는 소용돌이 밖의 세상은, 정말 그렇게 놓쳐도 괜찮을까?

중요한 사실은 이 상황이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으리라는 것이다. 땅을 보며 걷고, 서로 소통하지 않는 것이 사회적으로 진정한 문제가 된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해결책은 나올 것이다. 기술은 늘 진화하니까. 앞으로 또 인간이 기술로 인해 어떻게 변해갈지 겁나면서도 기대가 된다.

2001년, 아직 스마트폰이 아닌 휴대폰이 대중화되던 시절, 음악회에서 늘 휴대폰 소리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상황을 음악으로 만든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Golan Levin의 Dialtones: A Telesymphony. 그는 Gregory Shakar, Scott Gibbons, Yasmin Sohrawardy, Joris Gruber, Erich Semlak, Gunther Schmidl, Joerg Lehner와 함께 이 작품을 발전시켰다. 관객들의 휴대폰 번호를 미리 받아 전화를 끄게 하는 대신, 오히려 벨을 울려 시작하는 심포니. 그 우연성과 공간적 분산이 만들어내는 변주는 특별했다.

2025년 지금 이 작품을 다시 들으면, 시간의 흐름과 기술의 변화를 함께 느낄 수 있다. 동시에 그 시절 문제시되던 것들이 지금 와서는 별것 아닌 것으로 치부되는 상황도 보게 된다. 사실 스마트폰 이전에도 문화적 충돌은 늘 있었다. 지금 우리가 느끼는 ‘짜증스러움’과 답답함도 언젠가는 “아, 그땐 그랬지. 좋은 시절이었네. 휴대폰을 손에 들고 걷다니!” 하고 추억할지도 모른다.

예술이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중요한 점이 있다. 현시대의 기술을 동반한 예술은 그 시대성을 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지금 들리는 그 벨소리에 담긴 개개인의 기억들은 우리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