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idore Cohen, 82, Violinist in Premier Chamber Groups, Is Dead

June 28, 2005
Isidore Cohen, 82, Violinist in Premier Chamber Groups, Is Dead
By ALLAN KOZINN

Isidore Cohen, a violinist who, as a member of the Juilliard String Quartet and the Beaux Arts Trio, was an important chamber music performer and a teacher, died on Thursday in the Bronx. He was 82 and lived in Manhattan.

Mr. Cohen’s death was announced by Frank Salomon, an administrator of the Marlboro Music School and Festival, the summer program in Marlboro, Vt., where Mr. Cohen taught for nearly 40 years.

A genial, energetic musician whose interests ranged from Haydn to Elliott Carter, Mr. Cohen can be heard on dozens of classic recordings by the Beaux Arts Trio, including the complete Haydn and Beethoven Piano Trios and works by Tchaikovsky, Rachmaninoff, Ives and Shostakovich.

As the ensemble’s violinist, he held a pivotal position, physically as well as musically. Early in Mr. Cohen’s tenure with the group, the players decided that for acoustical reasons, the cellist – then Bernard Greenhouse – should face the audience directly. That meant that Mr. Greenhouse could not make eye contact with Menahem Pressler, the group’s pianist. In what became a Beaux Arts visual quirk, Mr. Pressler regularly glanced over his shoulder at Mr. Cohen who, because he had eye contact with both of the other players, became a relay between them.

Mr. Cohen was born in Brooklyn on Dec. 16, 1922. He began studying the violin at 6 and continued his studies at Music and Art High School in Manhattan, from which he graduated in 1940. At the time, however, he had not decided to seek a musical career, and enrolled at Brooklyn College as a pre-med student. His studies were interrupted in 1943, when he joined the United States Army and fought in Europe. During his three years in the service, Mr. Cohen performed in the Army’s symphony orchestra and in jazz bands.

When he returned to the United States, Mr. Cohen became a student of Ivan Galamian at the Juilliard School, and began a career as a freelance violinist. Starting in the early 1950’s, he was concertmaster of the resident orchestras at the festivals directed by the cellist and conductor Pablo Casals, in Prades, France, and in San Juan, Puerto Rico. He was later the concertmaster of several New York ensembles, including the Little Orchestra Society and, for several of its early seasons, the Mostly Mozart Orchestra.

At the Casals festivals, Mr. Cohen met the violinist Alexander Schneider, who invited him to join the Schneider String Quartet as second violinist, in 1952. Among the Schneider Quartet’s accomplishments was a traversal, both in concert and on recordings, of the complete Haydn quartets. In 1958, Mr. Cohen joined the Juilliard String Quartet, also as second violinist. He performed with the group for a decade.

When the Beaux Arts Trio’s original violinist, Daniel Guilet, retired in 1968, Mr. Pressler and Mr. Greenhouse invited Mr. Cohen to take his place. Mr. Cohen was reluctant at first.

“It seemed to me that the best thing to do would be to work together for a week or so and see how it went,” he said in a 1979 interview. “But they said, ‘no, either you want to join or you don’t.’ I knew their playing, they knew mine, and it was two against one, so I joined.”

By the mid-1970’s, the Beaux Arts had become the world’s most prominent piano trio and was touring and recording plentifully. Mr. Cohen remained a member until his retirement in 1992.

During his years in the Juilliard and Beaux Arts groups, Mr. Cohen also taught, and was at various times a member of the faculties at the Aspen Festival, the Curtis Institute of Music in Philadelphia, the Juilliard School, Princeton University, the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at Stony Brook, and the Manhattan School of Music. His most long-standing association, though, was with Marlboro, where he began teaching in 1966. He regularly toured as part of Musicians from Marlboro, a flexible ensemble that included both faculty and student performers.

He is survived by a daughter, Erica Cohen of Tepoztlán, Mexico, and a son, Allen Cohen, of New York City, Marlboro and Madrid.

Mary J. Blige-메리 제이 블라이즈-

http://mjblige.com/1971년 뉴욕 출생
스타일 : R&B, HipHop, Urban
레이블 : MCA, Uptown/MCA
유사한 뮤지션 : Faith Evans, Usher, Brandy, Adina Howard, Yvette Michele, Shae Jones

[Biography]

Queen of soul(소울의 여왕). 흑인음악계의 여성 보컬리스트에게 붙여지는 수많은 수식어들 중에서도 가장 영예로운 명칭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90 년대의 여러 디바들 중 과연 누구에게 이 명칭이 가장 잘 어울릴까?

아마도 흑인음악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열의 아홉쯤은 메리 제이 블라이즈(Mary J Blige)의 손을 들어줄 것이다. 본명이 Mary Jane Blige인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Gladys knight (글래디스 나잇)이나 Al Green (알 그린) 등을 들으며 풍부한 감성을 키워왔으며, 그 덕에 말끔한 고음역이나 현란한 기교를 가졌다기보다는 영혼으로 노래하는 싱어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

이러한 그녀만의 재능은 ’92년 발표된 데뷔 앨범 ‘What’s the 411?’ 에서 비로소 세인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하는데, 데뷔 앨범이라기엔 이례적으로 300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며 “You remind me”, “Love no limit” 등 많은 싱글도 성공을 거두었다.

또한 메리 제이의 두 번째 앨범인 ‘My Life'(’94) 도 소포모어 징크스가 무색할만한 결과를 얻게 되는데, “My life”, “You bring me joy” 등의 싱글이 연타를 치며 그 해 그래미 시상식 (Grammy award) ‘Best R&B album’ 후보에도 지명되는 영광을 누린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Queen of the Hip Hop & Soul’ 이라는 그녀의 별칭이 익숙해지기 시작했고, 메리 제이의 1, 2집의 대부분 작업을 도맡아 했던 Sean “Puffy” Combs의 주가 또한 오르기 시작했다. 그 이후 3집까지 메리 제이에게는 3년의 공백기간이 생기는데, 이 기간 동안에도 쉬지 않은 그녀의 히트 행진은 계속되었다.

90년대를 대표하는 여성싱어들이 총망라되었다고 할 수 있는 OST 에서도 메리 제이의 힘있는 보컬은 특히나 인상적이었는데, 앨범 수록곡인 “Not gon’ cry”는 플래티넘을 기록하며 싱글차트 2위까지 오르는 기염을 토한다.

2집 이후 3년만인 ’97년 발표된 3집 ‘Share My World’는 이전 그 어느 앨범보다 화려한 진영을 자랑하며 당당히 앨범차트 1위에 오른다. R.kelly,Babyface, Jimmy Jam & Terry Lewis, Rodney Jerkins 등, 내로라하는 아티스트들이 즐비한 이 앨범은 ‘소문난 잔치엔 먹을 것도 많다’ 는 새로운 교훈을 심어주며 “Everything” 등의 싱글 히트곡을 낳았다.

세 번째 앨범의 성공으로 무척 고무된 메리 제이는 흑인 음악 뮤지션으로는 흔치 않은 라이브 앨범 를 이듬해인 ’98년에 발표하고, ‘Diva’s live’에도 참여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친다. 셀프 타이틀 앨범 ‘Mary'(’99) 는 자신의 이름을 타이틀에 건만큼, Elton John, Aretha Franklin, Babyface, Eric clapton, K-Ci hailey, Lauryn Hill, George michael 등 장르를 초월한 여러 뮤지션들과의 신선한 교류중에도 자신의 색깔을 잃지 않은 음악을 들려줘 다시 한 번 90년대 최고의 soul queen으로서의 면모를 과시했다.

[Discography]

1992 < What’s the 411? > Uptown/MCA
1994 < My Life > Uptown/MCA
1995 < Mary Jane > MCA
1997 < Share My World > MCA
1998 < The Tour> MCA
1999 < Mary > MCA

정수년 선생님

그녀가 아니었으면, 아마도 해금에 대해서 알지 못했을 이들이 있을 것이다. 하루의 바쁜 업무 일과가 끝나고 항상 그녀의 음악을 들으며 위로를 찾는다는,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한 은행원도 그 중 하나다.

두 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시간이 고요히, 그러나 수런거리며 흐르는 것을 느끼지조차 못했다. 어쩌면 그녀는, 꼭 자신의 음악 같기도 했고, 그가 설명하는 그의 고향 영동의 이미지와 닮아있기도 했다. 그가 어린 시절부터 접해온 자연과, 정수년 본인과, 그리고 그의 음악은 모두 하나처럼 보였다.
  
  

도무지 봄이 올 것 같지도 않을 것만 같이 추운, 2월 막바지에 다다른 오후에 한국예술종합학교, 그의 방을 찾았다. 꽃병이 화사하게 놓여있었고, 그가 따뜻한 차를 끓여주었다. 마음이 확 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조금 후에, 꽃병의 주인이 찾아왔다. 알고 보니 꽃병, 꽃 화분 몇 개가 모두 빌린 거였다. 빌려준 선생님이나, 빌린 선생님이나 모두들 민망하게 웃는데, 기자는 그 분위기가 퍽 좋았다. 꾸밈없고 정겹고 편안하게 느껴졌다.

박연의 고향 영동, 음악의 근간을 이루다

오남매의 막내로 태어난 정수년은 형제간의 터울이 커서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그 중에서도 아버지는 그를 그렇게 예뻐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부모님이 두 분다 일 하시고, 언니 오빠들이 공부하러 멀리 가면 늘 혼자였다. 조선 시대의 음악가 박연의 고향 영동은 ‘한 마디로 규정할 수 없는 곳’이었다. 서울과 부산의 중간에 위치해 우등열차(당시에는 이런 식으로 구분했다고)가 서는 곳이었고, 그래서 도회지의 물결이 조금씩 들어오기도 했다. 하지만, 산으로 둘러싸인 영동은 폐쇄적인 곳이기도 했다. 폐쇄와 들뜬 개방의 공기가 공존하는, 이상한 공간. 그 공간은 지금까지도 그의 음악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모양이었다. 감꽃이 떨어지면 감꽃을 꿰며 놀기도 했고, 친구들과도 가끔 어울렸지만, 가장 좋은 건 하늘을 보는 거였다. 파란 하늘도 좋고, 별이 뜬 밤하늘도 좋았다. 별에 매료되어 별을 연구하는 과학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는 그 별들의 신비를 음악에 담게 되었다.
  
  

중학교 시절 해금으로 큰 상(전국국악경연대회 1등)을 타게 되었다. 너무나도 내성적인 그에게 있어 그건 큰 사건이긴 했던 모양이다. 자신감을 얻고, 서울에 있는 국악고등학교에 진학하는 계기가 되었으니. 이렇게 두 줄로 줄여버리기에는 이 일은 정말이지 그에게 큰 사건이다. 이 이야기를 마치 어제 있었던 일처럼 생생하게 들려주는 정수년을 보고 있노라면, 기분이 이상해진다. 명실상부한 최고의 해금연주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이 너무나 소박해서 현실감이 오히려 없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정수년이고, 그 나지막함이 바로 음악이 되었으니, 그의 음악으로 위로를 받는 이들은 그 성격에 감사할 일이다.

무덤이라도 파헤치고 싶었던,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국악고등학교 연습실에서 바라보는 남산의 풍경은 아름다웠다. 그렇게, 서울살이에 익숙해지던 중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는 아버지의 오래된 사진을 기자에게 보여주었다. 낡은 사진 속에서 정수년의 아버지는, 바이올린을 들고 있었다. 찰현 악기에 대한 애정은 아버지에게서 물려 받은 것인가.

“아버지 이마에 푹 패이는 굵은 주름이 있었어요. 그 이마를 만지는 걸 내가 좋아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도 손에 남아있는 그 이마의 감촉이 여전히 생생한 거에요. 무덤을 파헤쳐서라도 다시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을 할 정도였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무대에 서는 그의 가장 큰 힘이 되기도 한다. 여전히 올라서면 떨리는 무대, 아버지에 대한 생각은 감정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만들어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의 음반을 기다리는 이들이 많다. 기자 또한 그 중 한 사람이고, 채근하듯 언제 내실 거냐고 물었다. 내성적이고 부끄러움이 많지만 해금에 대한 욕심만큼은 소름이 끼칠 정도다. 그는 쉽게 음악을 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음반을 낸다면 1집보다 나아야 한다는 부담감도 있고요, 무엇보다도 방향성을 제시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어요. 1집을 냈을 때는 아주 소박한 마음으로 냈는데, 그게 다른 해금 연주자들 혹은 학생들한테 이러저러한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됐지요. 꽃별(해금 연주자)이도 2집까지 냈고. 무엇보다도 선생이라는 신분 때문인지, 해금 연주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음악을 해야한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어요.”
  
  

해금 소리의 빛깔, 무수한 경계들, 꿈틀거림.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 그의 1집에서 가장 사랑 받고 있는 곡의 서정성이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의 음악들은 해금의 깊은 소리, 어두운 소리까지 끄집어낸다. 가끔은 늪처럼 사람을 침잠시키기도 하고 알 수 없는 침묵의 세계를 상상하게 만들기도 하는 그의 음악적 빛깔은, 그가 생각하는 해금 소리의 빛깔을 구현하려는 노력의 결과물들일 것이다.

“해금 소리가 좋았던 것은 그것이 복합적인 빛깔을 띠고 있기 때문이었어요. 밝음과 어두움 사이에 무수한 경계들이 있듯이, 혹은 산이 높다가도 낮아지고, 낮다가도 높아지는 꿈틀거림을 포함하고 있듯이, 그런 것들이 바로 우리 음악이 아닌가, 생각하기도 하고요. 그런 소리를 내는 것이 제 목표에요.”

이번 정동극장에서 가질 공연 때문에 이런저런 고민들을 갖고 있는 정수년, 그가 특히 이번 무대를 통해 들려주고 싶은 곡은 강준일 곡의 ‘소리그림자’라고. 그가 생각하는 ‘우리 소리의 빛깔’을 보여줄 수 있는 곡이기 때문이다.
  
  

그는, 어느 순간 너무 평범해 보이다가도(그래서 자꾸 인터뷰라는 것을 깜박하곤 했다), 끝 모를 깊이를 드러내기도 했다. 예를 들어 이런 대목은 그의 놀라운 뚝심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역사는 스타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묵묵히 자기 길을 가는 사람들이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늘 생각해 왔어요. 때문에 대중들이 원하는 음악만을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창작곡을 통해 해금의 가능성을 최대한 보여주고 싶어요.”

그가 어느 아침, 해금의 소리를 내어 보다가 왈칵 눈물을 쏟았듯이, 그의 음악은, ‘왈칵’의 느낌을 주는 한 순간을 제공한다. 그의 음악을 듣다 보면 노동과 사람, 삶이 마음 속에서 그려지고, 이야기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수런거림과 고요가 공존하는 이상한 순간이다. 해금은, 우리 음악은 그런 묘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그 발견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었던 정수년은 더 깊은 곳을 향한 항해를 준비중이다. 정동 극장에서 우리는 그가 발견한 해금의 아름다움과 나아갈 깊은 곳의 원경을 감상할 수 있을 듯하다.

  
티켓링크 / 남궁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