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타임스퀘어에 세계 최초로 해외 상설 국악 공연장 건립

꿈은 이루어진다.

장구 하나로 미국을 정복하겠다는 일념으로 묵묵히 한 해, 한 해를 문화사업에 땀 흘려 온 한국전통문화교육센터의 권칠성 대표가 뉴욕 타임스퀘어에 세계 최초로 해외 상설 국악 공연장을 건립한다.

[사진: “타임스퀘어에 여는 국악 상설 공연장의 모습 – 삼성 전광판 건너편 10층”]

브로드웨이의 유명 극장과 어깨를 나란히 할 이 상설 국악  공연장은2006년 6월 개관하여 전문 국악 공연과 문화, 예술 교육을 통해 우리의  몸짓과 우리의 소리를 세계에 알리는 역사적 장을 연다.  

타임스퀘어 공연장의 계약서에 서명하기까지 권대표는 “미친 짓이다”라는 우려 높은 만류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인 후원자 한 명, 정부의 지원 한 번 없이 지금까지 한 곳 만을 바라보고 뛰어 왔다.

권칠성 대표는 전설적인 장구 명인 고 전수덕 선생의 수제자이며, 18세 최연소의 나이로 프로 사물놀이패, 뜬쇠에 입단하였다. 고교 시절 이미 대통령상을 세번이나 입상할 정도로 ‘국악 신동’으로 불리어 왔다. 뜬쇠 단장을 역임하며 전세계 20여개국, 1200회 사물놀이 공연을 통해 우리 문화를 알렸으며, 1995년 사물놀이 주자로는 최초로 국악계 최고 영예인 KBS 국악경연대회 대상을 수상하여 사물놀이의 잣대를 올려놓는 기록을 성취했다. 그의 국악 경력에서 최고의 위치에 있을 때 그가 택한 길은 미국행이었다. 우리 고유 장단으로 미국을 정복하겠다는 결단이었다.

  

[사진: “권칠성 대표 공연 모습”]

권대표는 한국전통문화교육센터 (Korean Traditional Cultural Center)라는 비영리 기구를 세우고, 지난 3년 간 맨하탄 헌터 고등학교 (Hunter College High School) 와 뉴저지 릿지우드 고등학교(Ridgewood High School)등 뉴욕, 뉴저지 일대 중, 고교에 사물놀이 클럽을 만들어 고급 악기 세트를 기부하고, 무료 출장 강습을 늘려왔다.  학부모들의 마땅한 후원 없는 현실을 자각 하면서도 미국 속, 나아가 세계 속 한국인의 입지를 향상 시켜줄 도구는 전통문화 뿐 이라는 믿음 하나로, 헌터고 교장이 언제든지 쓰라며 직접 음악실 열쇠를 쥐어줄 정도로 열의를 다하여 학생들을 가르쳐 왔다.

2005년 5월 뉴욕 어린이 큰잔치에서 해외에서는 처음으로 100명 어린이 사물놀이단을 선 보였던 권대표는 그 행사를 성공으로 이끌기 위하여 재정적 어려움에도 아랑곳 않고 모든 악기를 사비로 충당하고100벌의 공연의상을 손수 바느질 했던 그 하루 하루를 기억 한다.  

[사진: “100명 어린이 사물놀이단의 공연 모습”]

2005년 7월, 메이져 리그의 선두주자 메츠의 홈구장에서 다시 한 번100명 사물놀이단을 이끌고 5만 여명의 관중들에게 아리랑의 감동을 선사 한 전무후무한 사례를 만들어 한인들의 어깨를 으쓱하게 하기도 했다.

이러한 그에게 잠들지 않는 도시 맨하탄, 그리고 그 심장부에서 역동적인 숨을 내쉬는 타임스퀘어에로의 도전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단계이다. 10년 안에 맨하탄에 공연장을 열겠다고 단언 했던 2001년 자신의 모습을 뒤 돌아 볼 때, 권대표는 그 목표를 반이나 단축 시킨 셈이다.

목표 달성을 앞 당긴 만큼 시련도 크다.

가슴 따뜻한 분들의 고마운 자원봉사에 어깨를 기대어 보지만, 개인, 기업, 정부 어느 누구의 재정적 지원이 전혀 없는 이 시점에서 공연장 준비와, 공사, 예술단 모집의 비용 100%를 권대표의 사비로 충당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뉴욕시 내 300여 군데 한인 상점을 발로 뛰며 후원요청서를 돌렸지만 고맙게 받은 정성은 단 50불.

하지만 재정적 어려움 하나로 자신의 아집을 꺾을 권대표가 아니다.

공연장  건립을 계획대로 추친함은 물론 이거니와,  현 20여명의 패기 넘치는 젊은 “꾼”들로 구성된 국악 예술단에 한국 최고의 예인들까지 스카우트하여 “타임스퀘어”라는 이름에 걸맞는 세계적 무대 공연을 연출함과 동시에, 매 주 금요일 저녁에는 무료 국악 공연을 마련하여 어느 누구나 쉽게 한국 음악의 진가를 접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한 번의 감동적인 아리랑이야 말로 한 사람의, 한 도시의, 한 국가의 한국에 대한 이미지를 바꿀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무기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공연과 병행하여 나갈  것이 바로 교육 프로그램이다.  현재 실행하고 있는 중 고교 사물놀이 보급 프로젝트는 매 해 열 학교씩 늘여 가고, 다양한 워크숍, 강좌, 체험 학습, 캠프, 출판과 음반 발매 등을 통 하여 한국의 전통문화, 예술, 역사, 정신 교육을  적극 실천한다.

한국전통문화교육센터는 타임스퀘어 상설 국악 공연장 건립을 계기로 한국인에게는 가슴 벅찬 자긍심과 애국심을 부여하고, 세계인에게는 한국에 대한 강한 이미지를 각인 시켜 역사적으로 문화 침략과 말살에 위축되었던 우리의 자존심을 회복 시키는 대한민국 제 1의 문화 정복자로 나설 것이다.

* 문화 사절단으로서 세계 무대에 도전 할 젊은 국악 예술단원을 모집하고 있습니다.

*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법. “무형의 가치”를 아는 뜻있는 후원자를 찾고 있습니다.

* 크고 작은 일, 사무적인 일에서부터, 번역, 웹매스터, 그래픽 디자인등 두루두루 자원봉사자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뉴욕 등지, 한국에서, 세계  어디에서나 인터넷을 통하여 도움을 주실 수 있습니다. 의미 있는 이 문화사업에 동참 하십시오.

* 공연장 주소: 701 7th Avenue, Suite 1001, New York, NY 10036

* 웹사이트: www.yourktcc.org

* 문의는212-764-2999 또는 yourktcc@gmail.com 으로.

서양 음악의 수입과 전통음악의 위축

1. 서양 음악의 수입과 전통음악의 위축

1) 양악의 일반화
서양음악이 본격적으로 우리나라에 수입되기 시작한 것은 개항이후 서양문물이 밀려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부터이다. 특히 서양 선교사들이 세운 교회와 학교는 일반인들에게 까지 파급효과가 컸다. 황실에서 세운 군악대도 역시 우리나라에 서양음악을 보급하는 데에 큰 영향을 미쳤다.
반대로 우리나라의 전통음악은 서양문물의 유입, 일본의 식민지 통치, 산업화정책 등에 의하여 상대적으로 위축되었다.

2) 전통적 생활 양식의 변화
음악은 그 시대의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갖기 마련인데 우리나라의 생활이 오늘날과 같이 바뀌면서 그와 관계된 전통음악이 설 자리를 상실하게 되었다. 즉 농촌문화가 도시 중심의 문화로 바뀌면서 농악과 민요들이 그 터전을 잃었고 궁중 및 사대부 사회가 없어지면서 연례악과 풍류악이 감상용의 음악으로 그 의미를 바꾸어 살아남아야 했다.
결과적으로 전통음악은

1) 단절의 위기를 맞았고
2) 과거의 음악이 되었고
3) 일반적이지 않은 음악이 되었고
4) 현실과 유리된 음악이 되었다.

2. 우리 음악 찾기의 시도들
우리 음악 찾기의 시도는 위의 문제들을 반성하고 개선하는 방향으로 진행하게 된다.

1) 전통의 계승

* 김기수의 <송광복>
연례악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다. 조선조에서는 고정된 레퍼토리를 그대로 연주하거나 그것을 편곡하여 파생곡을 만들었다. 작곡의 개념을 도입하여 우리나라 전통음악에 신국악의 길을 연 작곡가가 김기수이다. 그는 정악 특히 궁중악의 장중한 음향을 계승하여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관현악곡을 작곡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 이상규의 <대바람 소리>
전통음악의 어법을 대체로 충실하게 따르는 음악들은 연주가 출신의 작곡가들로부터 많이 나왔다. 가야금의 황병기, 대금의 이상규, 피리의 박범훈, 해금의 김영재 등이 좋은 예이다. <대바람 소리>는 대금이 가진 독특한 맛과 가능성을 잘 살려 나타내고 있다. 연주가 출신의 작곡가들 중에는 그 악기를 위한 새로운 레파토리를 생산해 내는데 힘을 기울이는 사람이 많았는데 독주곡은 물론 서양에서 협주곡의 개념을 도입하여 높은 기량을 요구하는 협주곡을 작곡하는 경우도 많았다. <대바람 소리>는 그 좋은 예이다.

* 김영재의 <적념>
전통을 계승하는데 있어서 각 악기가 가진 고유한 시김새를 살리되 다양한 기회에 연주할 수 있는 여러가지 음악내용의 악곡들을 생산하는 일의 중요성은 새삼 강조할 필요도 없다. 즉 ‘전통어법을 소화한 오늘의 악곡’이 있어야 전통이 박물관에 남지 않고 지속적으로 살아 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가야금을 공부하려는 학생들에게 그 공부 대상이 될 수 있는 여러가지 악곡이 필요하다. 위에 언급한 연주가 출신의 작곡가들이 적지 않은 독주곡을 남겼는데 <적념>은 최근에 만들어진 예중의 하나이다.

* 강준일의 <푸리>
전통음악을 계승하는 일은 서양음악을 공부한 작곡가들에 의해서도 이루어졌다. 서양의 현대음악을 공부한 작곡가들 중에는 전통음악의 재료를 자신의 음악에 이용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전통음악을 계승한다는 취지를 가진 경우는 많지 않았는데 강준일 역시 계승 자체가 목적은 아니었지만 사물놀이의 장단어법을 잘 소화하여 이를 관현악에 확대시킨 두 편의 사물놀이 협주곡을 작곡하였다. <푸리>는 그 중 하나로 무악의 장단을 그 바탕으로 하고 있다.

2) 현대화 – 세계화

* 이해식의 <해동신곡>
전통음악의 어법을 충실히 재현하는 것을 그 일차적인 목표로 하는 작곡가들이 있는 반면 전통음악의 어법을 그 바탕으로 하되 이 시대의 호흡에 맞는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지 않으면 국악은 결국 현대에 맞지 않는 어법을 가진 과거의 음악으로 남아있을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 중에는 매우 현대적인 음악어법을 사용하는 이들도 있다. 이해식의 해동신곡은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작품이다. 서양의 현대 어법 중에서 필요한 것들을 받아들이고 있다.

* 백대웅의 현악사중주 <신관동별곡>
전통음악의 어법을 이어 받되 오늘의 감각에 맞는 것으로 해야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는 이를 서양악기를 통해서 실현해 보기도 한다. 즉 악기는 어디까지나 도구 이므로 거기에 담는 음악의 내용만 확실하게 우리 고유의 음악 어법이면 우리 음악이 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사실 우리의 음악사는 전래된 외래의 악기가 결국 우리의 악기로 토착화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의 서양악기를 향악기화 하는 것이 현대를 사는 우리들의 과제인 셈이다.

* 강석희의 <부루>
전통음악의 어법을 이용하여 오히려 서양음악에서는 듣지 못하는 새로운 소리를 창조해 내는데 관심을 가진 작곡가들이 있다. 특히 이것은 서양의 현대음악을 공부한 작곡가들에게서 나타난다. 현대음악에서는 작가의 개성이 매우 중요시되므로 우리 작곡가들 역시 자신의 고유한 음악 세계를 찾아 나갔는데 이를 찾는 과정에서 자연히 우리의 전통음악을 그 중요한 자원으로 삼게 된 것이다. 나운영, 강석희, 김정길, 박재열, 이영조 등이 그 예이다. <부루>는 굿음악의 분위기, 남도 계면 가락을 연상시키는 선율, 시나위적인 합주 방식 등을 현대적으로 각색한 작품이다.

* 유병은의 <피아노 산조>
백대웅의 <신관동별곡> 경우에 서양악기로 하는 전통음악이라는 개념을 언급했었는데 그 개념에 가장 적합한 것이 유병은의 <산조>들이다. 그는 그의 <산조>들에서 전통산조의 가락과 장단을 그대로 이용한다. 다만 사용하는 악기가 양악기이기 때문에 그 악기에 맞는 소리로 번역한다. 물론 이 번역의 과정에서 전통적인 <산조>와는 다른 소리들을 찾아내 이용한다. <피아노 산조>의 경우에도 피아노 특유의 소리들이 많이 나타나며 때때로 현대적인 색채를 띈다.

* 서울 새울 가야금 삼중주단의 <시퀜스>
국악의 현대화와 세계화를 위하여 국악은 국경의 테두리를 넘어 다른 문화에 적용되어 보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국악이 아시아의 음악이 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필요하고 가능한 한 단계일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 다른 문화에서도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악기체제, 조율체제 등이 요구된다. 예를 들어 아시아 민족악단과 연대작업을 하고 있는 국립국악관현악단은 그러한 노력을 하는 단체의 좋은 예이다.
가야금 삼중주단 <서라벌>은 가야금의 가능성을 극대화하고 실내악악기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하며 현대의 감각에 맞는 음악을 만들어내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기존의 전통음악에는 연주할 수 있는 곡목이 없기 때문에 편곡과 작곡의 작업이 늘 뒷받힘되어야한다. <시퀜스>는 양악작곡가 전순희의 작품이다.

3) 대중화 – 생활화

* 김영동의 <신수제천>
국악이 다시 활발하게 살아남기 위해서는 다시 우리의 생활에 뿌리를 내린 음악이 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고 대중들이 사랑하 는 음악이 되어야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많은 작곡가, 음악가들이 이를 위하여 노력하는데 그 중에는 대중음악가들, 대중음악과 공동으로 작업하는 사람들도 있다. 국악가요, 국악과 대중음악의 만남 등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이벤트들이 그러한 예들이다. 김영동은 새로운 곡을 만들기도 하지만 기존의 전통음악 레퍼토리를 새롭게 포장하여 대중적으로 관심을 끌 수 있는 작품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신수제천>에서 사용하는 것은 주로 화성적 포장, 음색적 포장이다.

* 박범훈의 <신모듬>
박범훈 또한 국악의 생활화, 대중화를 위하여 노력을 많이 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이를 그러나 국악 자체를 체계화, 표준화, 합리화함으로서 달성하려한다. 즉 그는 정확한 음정을 내는 악기, 깨끗한 합주소리를 낼 수 있는 합주훈련, 대중이 이해하기 쉽게 만든 음악에 관심이 많다. <신모듬>은 사물놀이 협주곡으로 사물놀이의 역동적 음악을 국악관현악으로 확대한 곡이다. 국악의 장단이나 가락을 몰라도 접근할 수 있도록 쉽게 짜여져 있다.

* 슬기둥

4) 현실에의 접근

* 이건용의 <만수산 드렁칡>
진정한 우리의 음악이라면 그것은 우리의 삶의 모습을 닮은 어떤 것이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음악이 나타내는 정서가 늘 흥겹고 즐겁고 복스러운 것일 리 없다. 우리 삶에는 그에 못지 않게 슬픔과 괴로움이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한 어려움이 정치 사회적인 이유 때문에 생겼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음악이 정치 사회적인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는 없지만 이를 반영하고 함께 아파할 수는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80년대는 이러한 예술적 고민을 안겨준 시기였다. 광주의 악몽과 민주주의의 꿈 사이의 엄청난 거리를 괴로워하면서 고발의 노래, 희망의 노래를 부른 작곡가들이 있었다. <만수산 드렁칡>은 그 중에 잘 알려진 예에 속한다. 황지우의 같은 제목의 시를 그 가사로 하여 ‘오 망국은 아름답습니다’라고 노래한다.

* 김대성의 <밤>
김대성은 80년대에 대학을 다닌 젊은 세대의 작곡가이다. 그는 80년대의 아픔을 직접적으로 체험하며 학창시절을 보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실천을 몸소 실행했다. 즉 그는 새로운 음악의 대안을 찾아 우리 민족의 음악감수성이 살아 숨쉬는 고장을 찾아 다니며 그곳의 민중들이 지니고 있는 음악피를 자신의 몸에 수혈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체험을 바탕으로한 새로운 작품을 시도하였다. 그에게 있어서는 현실의 반영과 민족적 정서를 노래하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다. <밤>은 김남주 시인의 고발을 김대성의 정서로 음악화 한 것이다.

* 이건용의 <미아리>
현실을 그리는 노래이되 그것이 동시에 대중적일 수는 없을까? 그리고 더 가능하다면 우리의 고유한 정서가 배어 나오는 노래일 수는 없을까? <미아리>, <그렇지요>는 이를 위한 시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