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Ree Rimhak

최근에 안 사실인데 이임학 교수가 올해 1월에 돌아가셨다고 하네요…
이분의 인생을 보면 가끔씩 난 정말로 편하게 공부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아시는 분은 아실지 모르겠지만 이분의 인생을 올려봅니다…( 한국의 33인의 과학자(?), 까치 에 이분의 인생을 읽었을때 머리가 텅 빈듯한 느낌이 들었었던 거 같았던 기억이 듭니다…

——————————–

“조선말로 해주세요……. 조선말로 해 주세요… 조선말을 들으면 다시 생각나는 것들이 많습니다……”

이임학 박사(1922년 함남 함흥 출신)와 기자가 처음 통화한 내용이다. 그는 한국보다는 조선이라는 말이 익숙하게 나오는 한국이 일제시대로부터 해방전후 1940년 후반에 청년기를 보낸 시대의 사람이다.

그는 1944년 경성제대 물리학과를 조선인으로 최초로 수석으로 졸업하고 1946년 서울대학교 수학과 교수로 재직하게 되었다.한국역사에서 1944∼1945년도는 일제치하에서 저항하던 이육사가 북경의 감옥에서 해방을 일년 앞두고 옥사했고 시인 윤동주가 옥사했던 한국사의 아픈시절이었다. 그는 해방 후 김지정.유충호 등과 함께 국내 수학자들의 모임인 수학회의에서 투표를 통해 24세의 젊은 나이로 경성대학 수학과 교수가 됐다. 46년 9월5일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안을 반대하는 이공학부의 교원 38명이 집단으로 총 사퇴했는데, 이임학도 여기에 포함돼 있었다. 투표로 선출된 나머지 두 명의 수학자들은 모두 월북했고, 그 가운데 김지정은 46년 9월 15일에 새로 설립된 김일성종합대학 수학과의 초대 학과장이 됐다.이임학 박사도 해방 직후 국대안에 반대하며 사표를 낸 후 김일성대로 오라는 권유를 받고 북한에 갔으나 억압적 분위기에 실망해 다시 남한에 내려와 휘문고 교사 등을 하다가 서울대 교수로 복직했다. 그가 쓰레기 더미에서 외국학술지를 발견한 것은 이 무렵이다.

그는 1947년 어느날 남대문 근처를 지나다가 미군이 버린 쓰레기에서 발견한 미국의 수학지를 보고 조른(Zorn)이라는 유명한 수학자가 자기 연구 결과 중 중요한 한부분이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고 발표한 것을 이임학 박사는 그 답을 발견해 조른(Zorn)에게 편지했고 조른(Zorn)은 그 편지를 받고 이것을 미국의 수학계에 이임학이라는 이름으로 발표하게 되었다. 논문이 발표된 잡지는 미국수학회의 정기 학술지인 ‘불레틴 오브 어메리칸 매쓰매티컬 쏘사이어티(Bulletin of the American Mathematical Society)’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것도 이박사가 카나다로 공부하려 왔을 때였다. 본인도 모르고 그 본인이 태어난 조국에서도 모르는 사이에 그는 이미 세계적인 수학자의 반열에 들어가 있었다.

이것은 한국인 과학자가 최초로 해외에 논문을 발표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나는 그때까지 외국에 있는 대학에 편지만 하면 입학할 수 있는 것을 전혀 몰랐습니다. 아는 분의 도움으로 브리티쉬 컬럼비아 대학(이후 UBC로 표기)과 연결되었고 그 학교에서 장학금을 준다는 답장을 받았습니다. 그후 미국의 다른학교들에서도 장학금을 줄테니 오라는 제안을 받았지만 한번 간다고 약속한 것은 지켜야 한다고 생각해 브리티쉬 칼럼비아 대학으로 갔습니다 ” (대한수학회사 – 성지 출판사 1998년 인터뷰 전문)

그는 이런 이유로 1953년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밴쿠버에 들어오게 되었다.

이때부터 이임학 박사는 그동안 연구자료를 구하기 힘들었던 한국과는 다르게 연구에 필요한 모든 자료를 구할수 있는 UBC에서 그는 왕성한 연구 활동을 시작했다. 그가 이 대학에 유학 왔을 때 재미있는 일이 생겼다. 그는 이미 자기자신이 미주지역 수학계에 논문을 발표한 한사람의 학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박사의 서울대학교 제자이고 서울대학교 수학과 5회 졸업생인 김주환 박사(전 SFU 수학과 교수)와 7회 졸업생인 장범식 박사(전 UBC 수학과 교수) 말에 의하면 이임학 박사는 UBC 수학과를 세계적인 위치로 끌어 올린 연구가라고 말했다.

“1970년대 수학 확률론에서 최고의 학자였던 ‘Chung Kai Lai (鐘開來)’라는 중국계 학자(Stanford 대학 수학교수)가 밴쿠버에서 있었던 수학회에 참석하고 모든 일정을 단축하고 이임학 박사를 만나기 위해 노력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전세계 유명한 대학에 비하면 브리티쉬 컬럼비아 대학은 작은 학교이기에 대학자가 이임학 박사를 만나기 위해 무척 노력하는 모습은 인상적이었습니다. 그가 그렇게 노력한 이유는 이임학 박사가 발표한 논문들이 수학계에서는 엄청난 업적으로 인정되었고 밴쿠버 UBC에는 이임학이 있다는 말이 세계 수학계의 하나의 유행어처럼 된 적도 있다. 그리고 학자로는 최고의 영광인 카나다 왕립협회 회원이 되었다 이모임의 회원이 되었다는 것은 한국 수학계에서는 경사스러운 일이다”라고 덧붙였다.

그는 UBC 유학 2년만에 박사 학위를 땄다. 그가 수학계에 두각을 나타내면서 세계의 많은 학교에서 교수로 오라는 제안을 했고 그는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그 어떤 이론이 잡힐것 같은 그 시점에 그는 한국정부로부터 여권을 압수당했고 그는 갑자기 무국적자가 되었고 그 사건은 그의 모든 연구가 한국인 이임학이 아닌 카나디언 이임학으로 학계에 소개되는 한국 수학사의 오류를 들어내게 된다.

또한 이박사에게 이 사건은 그의 생에서 자신이 태어난 한국이 준 가장 깊은 상처로 아직도 남아있다.

20세기 초 군이론은 수학계의 최대 관심사였고 단순군에 대한 이론은 수학계의 중요한 부분으로 자라잡게 된다.

특히 기초군이 되는 단순군이 발견될 때마다 세계 수학계는 파문과 흥분으로 떠들썩했다.

이 파문의 주인공 중의 한 사람이 그였다. 그는 60년대 두 종류의 새로운 단순군을 발견한 수학자이다. 그는 자신이 발견한 군론에 ‘리군(Ree Group)’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의 연구에 대한 평가는 대단한 것이였다. 이 새로운 단순군의 발견으로 이임학은 프랑스의 갈루아, 노르웨이의 리(SOPHUS LIE), 독일의 펠릭스 클라인, 프랑스의 C 슈발리에로 이어지는 군론의 역사에 당당하게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된 것이다. 그의 리군 (Ree Group)에 대한 연구논문이 1984∼1994년까지 90여편이 나올만큼 그의 연구는 세계수학사에 중요한 연구 업적으로 남아있다. 특히 어느나라 수학사전이든지 이임학의 리군 (Ree Group)이론은 이임학의 성을 딴 리군 (Ree Group)으로 나와 있다는 것이 이색적이다.

프랑스인 J.Dieudonne가 쓴 A Panorama of Pure Mathematics에 옛날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군이론에 공헌한 학자 21명에 꼽힐 정도로 그가 남긴 수학계의 연구 업적은 매우 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의 리군 (Ree Group) 2종과 20여개의 단순군에 대한 연구 결과는 그를 세계 수학계의 거목으로 만들었고, 뿐만 아니라 그는 현대 수학계에서 가장 유명한 수학자 라그랑드 (Langlands)란 제자를 양육한 스승으로도 유명하다.

그중 그의 Ree Group론은 일본의 저명한 ‘이와나미’ 수학사전에, 그리고 미국의 수학 백과사전에도 기록이 되어있는 것은 그가 발견한 리군 (Ree Group)에 대한 학문적 평가를 높게 하고 있음을 증명해 주었다.

이박사의 연구 활동은 계속되었고 그가 연구논문을 발표할때마다 수학계는 긴장했고 그 결과에 대해 찬사를 받았다는 흔적은 많은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는 현재 밴쿠버에서 UBC 학생 진료소 의사인 중국계인 부인 Rhoda Ree과 둘이 살고 있고 아들 3형제는 모두 각자의 영역에서 일을 하고 있다.

이임학 박사의 아내이면서 그의 연구활동을 말없이 뒤에서 그림자처럼 보아온 Rhoda Lee는 “내 남편 이임학 박사의 삶은 수학이다. 이박사는 수학자이다. 이것 외에는 그를 설명할 어떤 말도 없다”라고 명확하게 이임학 박사에 대해 정리했다.

이박사는 수없이 반복해서 말했다. “조선말로 해주세요, 조선말로……”.

그를 버린 조국에 대해 그의 삶 어느곳에서도 남아 있지 않을 것 같은 조선, 한국이라는 말을 건강이 좋지 않은 지금에도 찾고 있는 그. 그는 이제 삶의 긴 여정을 마치고 조용히 돌아와 거울 앞에 선 한 그루 가냘픈 동양란이었다.

장 미쉘 바스키아

몇년만에 바스키아를 다시보았다.
어릴적 바스키아를 알게 된후
당시 거의 바스키아와 앤디에게 미쳤었는데
그후 몇년후 비디오샾에서도 구할 수 없게된
바스키아 영화를 다시 보게 되었다.
왠지모를 아픔과 눈물이 무척 오랫동안 마음속에 담기는
바스키아의 생과 그의 작품..
폴락을 봤을때에도 느껴지지 않았던
그런 애뜻함과 존경심이 있다.
영화에선 물론 영화가 되기위한 부분들이 있지만..
실제 그는 훨신 더 작품세계에 몰입하고 살았다.
미친듯이 그의 그림을 수집하고 모으고(비록 실제그림도 아닌 jpg이지만..)
그의 그림에 흠뻑젖어 하루동일 가슴을 쳐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