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곡을 하는 사람으로서 작품을 쓸 때에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는 문제가 바로 생각을 표현할 때에 무엇을 고려하며, 내 기준이 이 세상과 객관적인 입장에 섰을 때에 나의 아이디어가 어느 위치에 서 있으며, 또 내가 어느 부류에 있는가 등등이 된다. 즉 시대에 발맞추는가, 새로움을 주고있는가 등에 대한 자신의 생각에 끊임없는 의심과 의심을 반복하기 나름이다.
하지만 정작 배보다 배꼽이 더 커져버린 것은 아닐까?
2005년도 어느 현대음악발표회에서 어느 작곡가가 다장조의 작품을 썼다고 한다면
분명 사람들은 분명, 저 작곡가가 다장조에 큰 의미를 부여했을 거야. 무언가 있겠지. 라는 부분,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그래도 그것이 구시대적 발상이 아닌가? 하는 부분.
우리는 음악을 듣는 것일까 사상을 듣는 것일까?
때론 아이디어를 내야만 하는 입장에서 위와 같은 입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되며, 작곡가 스스로 비판하는 입장에 서 있을 때도 똑같은 말들을 하게 된다. 작곡가들은 진정 비판하기를 즐기며 비판 받기를 두려워한다.
비단, 다장조의 부분이 아니라 하더라도, 우리는 음악을 듣고 새로움을 갈망하며, 우리가 ‘예상’ 할 수 있었던 부분에 있어서는 “유치”로 치부해 버리는 습관이 있는 것은 아닐까?
왜 우리는 이토록 비판하며 비판 받아야만 하는 것일까? 물론 나는 이것이 피해갈 수 없는 현상이며, 옳고 그름을 떠나서 당연히 존재할 수 밖에 없는 부분이라는 것은 인정한다. 이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러나, 작곡을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이것에 대한 극복의 차원이라는 것이 필요한데, 그것이 곧 용기이다.
실제로 작곡을 하는 우리는 많은 경쟁 속에 있다. 우리가 일명 ‘좋은 곡’을 작곡했다고 한다면 그것을 알아주는 것은 ‘청중’이 되지 않겠는가? 그리고 우리는 반응을 통하여, ‘아. 그래도 내가 꽤 괜찮은 곡을 썼는가?’ 라고 생각하기도한다. 따라서 작곡가가 작품을 구상 할 때에 청중의 반응을 고려하지 않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한가지 이유는, 나 자신이 남을 비판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인정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비판을 반대할 것인가?
우리가 ‘비판’이라고 하는 것에는 지극히 ‘주관’이 따른다. 그 주관이 ‘다수’와 일치할 때에 그것은 시대의 흐름이 되며, 그 시대의 흐름은 예술적인 역사의 남겨지게 될 것이다. 그럼, 작곡을 하는 사람들은 주로 그 ‘부류’에 속하게 된다. 왜냐하면 비판 받기를 거부하는 인간적인 속성 때문이다.
하지만, 작곡가가 작품을 쓸 때에 그토록 비판 받기를 겁내 하며, 또한 자신의 아이디어에 있어 끊임없는 의심을 할 때에 그가 꼭 생각해 내어야 하는 것은, 역사의 획을 긋는 것은 바로 부류가 아닌 ‘우회’의 과정 속에서 생겨난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새로움’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다장조의 이야기를 했던 것처럼 그것이 ‘새롭지 않은 우회’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을 나는 ‘신념’이라고 표현을 하고 싶다.
예술을 하는 목적이 무엇일까? 예술은 역사에 내 이름을 남기기 위함이 아니다. 예술은, 내가 생각하는 것을 말이 아닌 다른 매개체로 전달하는 외부적인 개념과 동시에, 자신의 정신세계의 또 다른 표출의 방법이다. 즉, 이것을 교감할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은 작품이라는 가치로 매김된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에도 그것은 한 예술가에게 있어서 또 다른, 즉 공중에서 잡히지 않는 하나의 주파수가 되듯 그렇게 하나의 작품이 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공중에서 라디오에 잡혀서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는 다른 주파수와 비교한다고 한다면 말이다.
예술이 반드시 그 탄생과 동시에 사람들과 교감이 되어야 한다는 법은 없다. 예술이 사람들에게 있어서 어떤 즐거움이 된다면 그것은 청중에게나 예술가에게나 더할 나위 없이 기쁜 일이 될 것이지만, 나의 개인적인 관점으로 예술가가 초점을 맞추어야 할 부분은 사람들에게 교감시키는 것이 아니다. 즉, ‘나의 세계관에 대한 신념이 얼마나 강한가, 저 작품이 나의 신념 그 자체인가. 또한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어떤 주파수로 만들어 내었는가’가 되는 것은 아닐까?
나는, 예술가, 특히 나를 비롯한 작곡가에게, 유치함에 있어서 두려워하면 안 된다는 다짐의 기회를 주고 싶다. 어차피 예술이 밥벌이가 된다면, 그것이 가지는 생명력이라는 것은 이미 값이 매겨져 버렸기 때문에 값어치가 떨어져버릴 수 있다. 예술이 배고픈 직업이 되는 것은 수많은 예술가에게 하루 이틀의 문제가 아니니 조금 잊어버리자. 그리고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을 보자. 내가 진정 다장조가 좋으면 써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청중을 위하는 일이 아니다. 청중을 돌이켜 보기 이전에 나와 작품과의 관계와 세계를 돌이키고 되새겨보며, 그것이 예술을 하는 당사자에게 어떤 의미가 되는 것인지가 예술가에게 있어서는 더욱 중요한 일이 될 수도 있다. 수많은 시행착오와, 수많은 관점의 발전과 교체와 변화가 한해 한 해 달라져가면서, 우리가 진정 내 자신의 유치함이 되었던 것이 그 힘으로 말미암아 크게 승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말이다. 에너지는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에너지는 사라지지 않는다. 작품에 몰두하여 어느 한 사람이 만들어낸 그 세계는 결코 사라지지 않으며, 그것을 끊임없이 생각하고 생각할 때에 그것은 곧 예술작품으로서 승화된다는 것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래서 나는 글을 읽는, 즉 예술을 하는 사람이 읽고 있다면, 일단 남의 작품을 비판 하기 이전에 내가 어떤 부류에 그들의 작품들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못하면 그만두지.’ 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일종의 작은 감각적인 문제를 크게 치부시켜 그들의 인생 자체를 하락 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이켜 볼 필요도 있다. 또한, 그들에게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 하는 것에 있어서 어떤 두려움도 갖지 말라는 격려를 하고 싶다. 동시에 나는 나 자신에게도 그렇게 격려하며 이 글을 쓰고 있다. 또한, 그 신념을 버리지 않을 때에, 우리의 인생은 작지만 아주 무겁고 단단해 질 수 있다. 그것은 나, 그리고 나 자신 속의 나와의 문제일 뿐이다. 인생이 전부 그렇게 흘러가듯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