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런거리는 우리문화, 풍류와 전통 바로 세워야”
정악 가야금으로 고유문화 되살리는 선봉장
한 꼬마가 한복 차림에 족두리를 쓰고 제법 의젓하게 가야금을 탄다. 한 여인이 가야금 현에 손을 얹고는 미소 짓고 있다. 족히 30년은 넘는 시간의 간격을 보여주는 두 사진은 결국 한 사람의 영상이다. 그러나 이제 두 사람의 존재 행태는 아예 타인이나 다름없다. 30년의 세월을 사이에 둔 둘 사이의 음악적ㆍ미학적 거리는 대척점이라 해도 좋다. 두 번째 앨범 ‘8개의 정경’(C&L 뮤직)에 수록된 두툼한 해설지 속의 사진 두 장은 참으로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CD에 수록된 여덟 곡은 광대한 신지평을 펼쳐 보인다.
한여름 연습실의 망중한일까. 두 가야금을 나란히 비교해 볼 수 있는 그림을 담고 싶었던 사진 기자의 요구에 이래저래 포즈를 취하는 그녀의 모습에 연습중이던 단원들이 숫제 환성까지 지르며 분위기를 띄운다. 날렵한 산조(散調) 가야금을 껴안더니, 평소 자신의 모습과 왠지 어긋난다는 듯 수줍게 웃고 마는 이지영(39ㆍ용인대 국악과 교수). 옆에는 자신보다 키가 큰 또 하나의 가야금이 있으니, 이름하여 법금(法琴) 가야금. 정악(正樂) 가야금이라고 한다.
– 현대적인 맛으로 되살리는 고유의 멋
가야금 하면 열에 아홉은 산조 가야금을 떠올리기 십상이지만, 그는 바로 저 무뚝뚝한 표정의 정악 가야금으로 고유 문화를 되살리는 선봉장이다. 거기에는 퓨전이란 이름 아래 제 모습을 잃어 가는 우리 풍류의 전통을 바로 세운다는 의기와, 고유의 멋을 현대적인 맛으로 되살려 낸다는 자부심이 함께 하고 있다.
“공연을 앞두고 매일 오후 8시부터 3시간씩 연습하고 있어요.” 물론 합동 연습만 해도 그렇다는 말이다. 올여름도 제대로 쉬기는 글렀는가 보다. 자신이 이끄는 한국현대음악앙상블(Contemporary Music Ensemble KoreaㆍCMEK)의 발표회가 머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만들어 6년째 이끌어 오고 있는 이 앙상블은 국악기 5대(가야금, 대금, 피리, 생황, 타악)와 양악기 4대(첼로, 클라리넷, 타악, 기타)로 편성돼 있는 독특한 단체다.
국악과 양악의 퓨전을 내건 연주단은 이제 낯설지 않다. 마음만 먹으면 명클래식 작품을 국악기로 연주 취입한 CD를 여반장으로 구할 수 있다. 일본이나 중국의 전통 악기 연주자들이 먼저 해 온 일 아니던가. 그러나 이처럼 1 : 1(정통:창작)의 비율을 의식적으로 내걸고 각 분야의 정상급 연주자들을 모았다는 점, 정상급 현대 작곡가들과 긴밀한 관련을 맺고 실험적인 작품을 잇달아 초연하는 단체는 없다.
이 악단은 작곡가가 실험적이든 의욕적이든, 그들이 여하한 테크닉을 요구하더라도 거뜬히 소화해 내는 솔리스트들로 이뤄져 있다는 정평이 나 있다. 현대 음악 작곡가들로서는 참으로 귀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국악과 양악, 모두로부터 신뢰를 얻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예를 들어 김정승(32ㆍ대금)은 국립국악원 정악단으로서 전통과 현대 음악에 두루 능통하다. 멀티폰(한 호흡으로 두 소리를 동시에 내는 주법), 순환 호흡(연주음을 끝없이 지속시키는 주법) 등 관악기로 구사할 수 있는 초절기교를 한몸에 체득했다는 점에서 독보적인 인물이다. 또 박정민(35ㆍ첼로)은 서양 악기 주자이지만 국악기와 가장 많이 협연해 오고 있는 주인공으로 그 같은 음악적 여정이 10년을 웃돈다. 그가 얼마나 신뢰 받는 주자인가 하는 점은 현대음악의 세계적 거장 펜데레츠키가 그를 염두에 두고 새 첼로 협주곡을 작곡해 초연까지 의뢰했다는 사실이 웅변한다.
그들이 모여 지난해 8월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가졌던 정기 발표회 무대는 감동의 도가니라는 상투적인 표현이 머쓱할 정도였다. 발표된 11곡에는 춤과 연기도 포함돼 있었다. 덜구춤(관을 묻고 당을 다지는 춤)과 상여 놀이 등 평소에는 제자리를 지키며 연주만 하던 국악과 클래식 주자들이 펼쳐 보이는 뜻밖의 연극적인 시도에 객석은 더 이상 즐거울 수 없었다. 악(樂)이 가(歌)와 무(舞)와 함께 어우러지는 풍류의 정신에 사이버 시대는 더 이상 냉정해질 수 없었다.
“그렇지만 올해는 본연의 모습에 충실할 생각이예요.” 과유불급(過猶不及)임을 알기 때문이다. 5곡을 헤아리는 신작들의 음악적 논리에 집중하는 무대를 만들겠다는 각오다. 박동욱 강준일 조인선 임준희 등 국내 작곡가들의 작품은 물론, 뉴질랜드 작곡가 딜런 나르델리가 자신을 염두에 두고 초연을 의뢰한 작품까지 있기 때문이다. “가야금의 재료인 오동나무를 뜻하는 ‘Paulownia’라는 곡이죠.” 국악기(가야금, 대금)와 양악기(기타,첼로, 비올라)가 어울려 만드는 “ 아름다운 현대음악”이라 한다. 바로 자신의 음악적 목표다. 가야금은 그를 위한 가장 확실한 길이다.
그는 최초의 가야금 박사(실기)다. 1997년 이화여대 황병기 교수의 문하에서 득한 박사 학위가 그것이다. 실제 연주자에게 박사 학위가 뭐 그리 대단할까, 하고 묻는 사람도 있을 지 모른다. 그러나 전통적 산조 연주를 기교적으로 통달하는 것이 가야금 실기의 끝이라고 생각하기 마련이었던 상황에서 그는 가야금 연주에 철학이 있다는 점에 파고 든 것이다. 그것은 결국 본인의 말마따나 “평생 구도자가 되는 길”이다. 길은 어떻게 시작됐던가?
불국사 바로 앞동네에서 태어났다. 왕릉은 그의 놀이터였고, 때로는 뒷간이었다. 어려서부터 예능쪽으로 재능을 보였던 그를 눈여겨 보고 있던 부친은 당시 경주 시내의 인간문화재급 전통 음악인 이말양 선생을 찾아 가 딸을 제자로 삼게 했다. 기생 조합인 권번(券番)에서 선생이 익힌 가야금, 판소리, 고전 무용(승무ㆍ살풀이 등) 등 전통 기예가 고사리손으로 흘러 들어 왔다. “언젠가는 한국 음악이 빛을 본다고 말씀하시던 아버님 덕분에 지금의 제가 있는 거죠.” 지금은 출입 금지된 안압지에서도 공연했고, ‘ 신라문화재상’ 등이 줄줄이 따랐다.
7살때 서울로 와 초등학교에 들어 간 그는 공부라곤 해 볼 틈이 없었다. 국악 콩쿨상은 독식하다시피 한 그는 정규 학과는 돌아볼 틈이 없었다. 3학년때 처음으로 전바탕 연주를 이뤘다. 성금연류. 예술학교인 선화중에 가야금 전공으로 입학한 그는 산조ㆍ정악ㆍ창작 음악 등 당시 가야금에 요구됐던 음악 장르를 다 떼냈다. “국립국악원에 계시다 정년 후 후학을 지도하신 가야금 정악의 대부 최충웅 성생님 덕분에 정악의 뿌리는 튼튼하다고 자부해요.” 이 무렵 녹음해 둔 자신의 연주는 그가 3년 전에 종합 편집해 3장의 CD로 구워 내 보관중이다.
선화예고에서 남성적인 김병호류의 산조를 체득해 튼실한 토대를 마련한 그는 서울대 음대 84학번으로 입학해 김정자 선생의 아래서 혹독한 단련 기간을 견뎌냈다. 26세, 그는 정악 실내악단으로 최고의 연주단인 정농악회에 최연소로 입단했다. 1988년 대학원으로 들어 가 이재숙 선생을 모신 그는 이듬해 ‘흙담’을 연주해 화제의 주인공이 됐다. 연주가 불가능한 작품이라는 통념탓에 악보 밖으로 나올 수 없었던 곡을 최초로 실연해 보인 것이다. 졸업 직후 들어 간 국립국악원에서의 연주 역시 화제를 모았다.
– 전통악기와 서양음악의 만남
1993년 정농악회가 후원했던 행사 ‘베를린 – 서울 페스티벌’에서 독일 작곡가 클라우스 후버가 가야금을 위해 지은 작품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그는 현대 음악과의 만남을 화두로 삼게 됐다. 1994년 국악원에서 펼쳤던 ‘개량 가야금의 밤’에서 활짝 발현된 이래 이렇듯 다양한 울림으로 이어져 오는 바다. 18현, 21현 가야금이 한자리에서 연주된 최초의 사건이었던 그 날 밤의 경이는 1996년 장흥 토탈미술관에서 펼쳐졌던 ‘가야금을 위한 현대 음악’으로 이어졌다. 그는 거기서 자기 평생을 걸만한 일을 발견한 것이다.
1998년 독일에서 벌어졌던 ‘코리언 페스티벌 – 동시대의 한국 음악 연주회’. 전통 악기로 난해한 현대음악을 연주하는 그 자리에서 그는 객석으로부터 5회에 걸친 커튼콜을 받았던 것이다. “내 평생의 일이라는 점을 확신한 계기였어요. 동양의 전통 악기로 현대 음악을 연주하는 작업에 함축된 거대한 가능성을 본 거죠.”
동양의 전통 악기와 서양 음악의 만남은 음악의 이름으로 21세기가 할 수 있는 거대한 실험이다. 그러나 한국은 하드웨어적으로 너무나 미흡하다. 전위예술가 존 케이지가 일본의 피리 샤쿠하치를 위해 신곡을 헌정한 것도, 도쇼 호소카와 등 일본의 유명 클래식 작곡가가 자국의 전통 악기를 위한 작곡을 마다 않는 것도 모두 정부의 적극적 지원 덕이라는 설명이다.
음악에 관한 한 그는 철저한 완벽주의다. 요즘도 그는 연습을 많이 한 날이면, 자다가 앓기도 한다. 남편 김성철(44ㆍ사업)씨와의 사이에서 난 딸 김항아(10)가 “어머니의 가야금 산조에 신물 날 정도”라고 할 정도다. 수업 시절 밤 새워 공부할 적에는 엄지손가락이 물집과 굳은살 등으로 성한 날이 없었다. 뿐만 아니다.
‘거친 붓끝’의 작곡자 클라우스 후버로부터 음반 제작의 찬성을 얻기 위해서는 팩스, 이메일, 전화 등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야 했다. 답장을 기다리는 데 몇 달씩 걸리다 보니, 법적 절차를 모두 마치는 데 든 시간이 4년. “연주 방식 등 세션?부분까지 자기가 말한대로 하지 않으면 허락하지 않겠다고 하는 통에 많은 시간이 걸린거죠.” 후버가 보내 준 설명 그대로 재킷에 수록한 이번 음반에 대해 작곡자는 물론 그의 부인까지 매우 흡족해 한다는 것.
딸은 그 각고의 세월을 모른다. 2005년 9월 베를린의 콘체르토 하우스의 ‘한국 전통 악기로 연주하는 현대 음악 연주회’ 무대에 나가 청중을 휘어 잡을 어머니의 모습이 있기까지의 숨은 세월을. “다음 음반이요? 정통 산조로 내고 싶어요.” 1집 ‘이지영 가야금 보허사’는 정악, 2집은 현대음악, 3집은 산조라니. 그의 예술적 정-반-합일까?
장병욱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