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음악의 수입과 전통음악의 위축

1. 서양 음악의 수입과 전통음악의 위축

1) 양악의 일반화
서양음악이 본격적으로 우리나라에 수입되기 시작한 것은 개항이후 서양문물이 밀려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부터이다. 특히 서양 선교사들이 세운 교회와 학교는 일반인들에게 까지 파급효과가 컸다. 황실에서 세운 군악대도 역시 우리나라에 서양음악을 보급하는 데에 큰 영향을 미쳤다.
반대로 우리나라의 전통음악은 서양문물의 유입, 일본의 식민지 통치, 산업화정책 등에 의하여 상대적으로 위축되었다.

2) 전통적 생활 양식의 변화
음악은 그 시대의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갖기 마련인데 우리나라의 생활이 오늘날과 같이 바뀌면서 그와 관계된 전통음악이 설 자리를 상실하게 되었다. 즉 농촌문화가 도시 중심의 문화로 바뀌면서 농악과 민요들이 그 터전을 잃었고 궁중 및 사대부 사회가 없어지면서 연례악과 풍류악이 감상용의 음악으로 그 의미를 바꾸어 살아남아야 했다.
결과적으로 전통음악은

1) 단절의 위기를 맞았고
2) 과거의 음악이 되었고
3) 일반적이지 않은 음악이 되었고
4) 현실과 유리된 음악이 되었다.

2. 우리 음악 찾기의 시도들
우리 음악 찾기의 시도는 위의 문제들을 반성하고 개선하는 방향으로 진행하게 된다.

1) 전통의 계승

* 김기수의 <송광복>
연례악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다. 조선조에서는 고정된 레퍼토리를 그대로 연주하거나 그것을 편곡하여 파생곡을 만들었다. 작곡의 개념을 도입하여 우리나라 전통음악에 신국악의 길을 연 작곡가가 김기수이다. 그는 정악 특히 궁중악의 장중한 음향을 계승하여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관현악곡을 작곡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 이상규의 <대바람 소리>
전통음악의 어법을 대체로 충실하게 따르는 음악들은 연주가 출신의 작곡가들로부터 많이 나왔다. 가야금의 황병기, 대금의 이상규, 피리의 박범훈, 해금의 김영재 등이 좋은 예이다. <대바람 소리>는 대금이 가진 독특한 맛과 가능성을 잘 살려 나타내고 있다. 연주가 출신의 작곡가들 중에는 그 악기를 위한 새로운 레파토리를 생산해 내는데 힘을 기울이는 사람이 많았는데 독주곡은 물론 서양에서 협주곡의 개념을 도입하여 높은 기량을 요구하는 협주곡을 작곡하는 경우도 많았다. <대바람 소리>는 그 좋은 예이다.

* 김영재의 <적념>
전통을 계승하는데 있어서 각 악기가 가진 고유한 시김새를 살리되 다양한 기회에 연주할 수 있는 여러가지 음악내용의 악곡들을 생산하는 일의 중요성은 새삼 강조할 필요도 없다. 즉 ‘전통어법을 소화한 오늘의 악곡’이 있어야 전통이 박물관에 남지 않고 지속적으로 살아 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가야금을 공부하려는 학생들에게 그 공부 대상이 될 수 있는 여러가지 악곡이 필요하다. 위에 언급한 연주가 출신의 작곡가들이 적지 않은 독주곡을 남겼는데 <적념>은 최근에 만들어진 예중의 하나이다.

* 강준일의 <푸리>
전통음악을 계승하는 일은 서양음악을 공부한 작곡가들에 의해서도 이루어졌다. 서양의 현대음악을 공부한 작곡가들 중에는 전통음악의 재료를 자신의 음악에 이용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전통음악을 계승한다는 취지를 가진 경우는 많지 않았는데 강준일 역시 계승 자체가 목적은 아니었지만 사물놀이의 장단어법을 잘 소화하여 이를 관현악에 확대시킨 두 편의 사물놀이 협주곡을 작곡하였다. <푸리>는 그 중 하나로 무악의 장단을 그 바탕으로 하고 있다.

2) 현대화 – 세계화

* 이해식의 <해동신곡>
전통음악의 어법을 충실히 재현하는 것을 그 일차적인 목표로 하는 작곡가들이 있는 반면 전통음악의 어법을 그 바탕으로 하되 이 시대의 호흡에 맞는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지 않으면 국악은 결국 현대에 맞지 않는 어법을 가진 과거의 음악으로 남아있을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 중에는 매우 현대적인 음악어법을 사용하는 이들도 있다. 이해식의 해동신곡은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작품이다. 서양의 현대 어법 중에서 필요한 것들을 받아들이고 있다.

* 백대웅의 현악사중주 <신관동별곡>
전통음악의 어법을 이어 받되 오늘의 감각에 맞는 것으로 해야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는 이를 서양악기를 통해서 실현해 보기도 한다. 즉 악기는 어디까지나 도구 이므로 거기에 담는 음악의 내용만 확실하게 우리 고유의 음악 어법이면 우리 음악이 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사실 우리의 음악사는 전래된 외래의 악기가 결국 우리의 악기로 토착화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의 서양악기를 향악기화 하는 것이 현대를 사는 우리들의 과제인 셈이다.

* 강석희의 <부루>
전통음악의 어법을 이용하여 오히려 서양음악에서는 듣지 못하는 새로운 소리를 창조해 내는데 관심을 가진 작곡가들이 있다. 특히 이것은 서양의 현대음악을 공부한 작곡가들에게서 나타난다. 현대음악에서는 작가의 개성이 매우 중요시되므로 우리 작곡가들 역시 자신의 고유한 음악 세계를 찾아 나갔는데 이를 찾는 과정에서 자연히 우리의 전통음악을 그 중요한 자원으로 삼게 된 것이다. 나운영, 강석희, 김정길, 박재열, 이영조 등이 그 예이다. <부루>는 굿음악의 분위기, 남도 계면 가락을 연상시키는 선율, 시나위적인 합주 방식 등을 현대적으로 각색한 작품이다.

* 유병은의 <피아노 산조>
백대웅의 <신관동별곡> 경우에 서양악기로 하는 전통음악이라는 개념을 언급했었는데 그 개념에 가장 적합한 것이 유병은의 <산조>들이다. 그는 그의 <산조>들에서 전통산조의 가락과 장단을 그대로 이용한다. 다만 사용하는 악기가 양악기이기 때문에 그 악기에 맞는 소리로 번역한다. 물론 이 번역의 과정에서 전통적인 <산조>와는 다른 소리들을 찾아내 이용한다. <피아노 산조>의 경우에도 피아노 특유의 소리들이 많이 나타나며 때때로 현대적인 색채를 띈다.

* 서울 새울 가야금 삼중주단의 <시퀜스>
국악의 현대화와 세계화를 위하여 국악은 국경의 테두리를 넘어 다른 문화에 적용되어 보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국악이 아시아의 음악이 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필요하고 가능한 한 단계일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 다른 문화에서도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악기체제, 조율체제 등이 요구된다. 예를 들어 아시아 민족악단과 연대작업을 하고 있는 국립국악관현악단은 그러한 노력을 하는 단체의 좋은 예이다.
가야금 삼중주단 <서라벌>은 가야금의 가능성을 극대화하고 실내악악기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하며 현대의 감각에 맞는 음악을 만들어내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기존의 전통음악에는 연주할 수 있는 곡목이 없기 때문에 편곡과 작곡의 작업이 늘 뒷받힘되어야한다. <시퀜스>는 양악작곡가 전순희의 작품이다.

3) 대중화 – 생활화

* 김영동의 <신수제천>
국악이 다시 활발하게 살아남기 위해서는 다시 우리의 생활에 뿌리를 내린 음악이 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고 대중들이 사랑하 는 음악이 되어야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많은 작곡가, 음악가들이 이를 위하여 노력하는데 그 중에는 대중음악가들, 대중음악과 공동으로 작업하는 사람들도 있다. 국악가요, 국악과 대중음악의 만남 등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이벤트들이 그러한 예들이다. 김영동은 새로운 곡을 만들기도 하지만 기존의 전통음악 레퍼토리를 새롭게 포장하여 대중적으로 관심을 끌 수 있는 작품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신수제천>에서 사용하는 것은 주로 화성적 포장, 음색적 포장이다.

* 박범훈의 <신모듬>
박범훈 또한 국악의 생활화, 대중화를 위하여 노력을 많이 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이를 그러나 국악 자체를 체계화, 표준화, 합리화함으로서 달성하려한다. 즉 그는 정확한 음정을 내는 악기, 깨끗한 합주소리를 낼 수 있는 합주훈련, 대중이 이해하기 쉽게 만든 음악에 관심이 많다. <신모듬>은 사물놀이 협주곡으로 사물놀이의 역동적 음악을 국악관현악으로 확대한 곡이다. 국악의 장단이나 가락을 몰라도 접근할 수 있도록 쉽게 짜여져 있다.

* 슬기둥

4) 현실에의 접근

* 이건용의 <만수산 드렁칡>
진정한 우리의 음악이라면 그것은 우리의 삶의 모습을 닮은 어떤 것이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음악이 나타내는 정서가 늘 흥겹고 즐겁고 복스러운 것일 리 없다. 우리 삶에는 그에 못지 않게 슬픔과 괴로움이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한 어려움이 정치 사회적인 이유 때문에 생겼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음악이 정치 사회적인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는 없지만 이를 반영하고 함께 아파할 수는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80년대는 이러한 예술적 고민을 안겨준 시기였다. 광주의 악몽과 민주주의의 꿈 사이의 엄청난 거리를 괴로워하면서 고발의 노래, 희망의 노래를 부른 작곡가들이 있었다. <만수산 드렁칡>은 그 중에 잘 알려진 예에 속한다. 황지우의 같은 제목의 시를 그 가사로 하여 ‘오 망국은 아름답습니다’라고 노래한다.

* 김대성의 <밤>
김대성은 80년대에 대학을 다닌 젊은 세대의 작곡가이다. 그는 80년대의 아픔을 직접적으로 체험하며 학창시절을 보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실천을 몸소 실행했다. 즉 그는 새로운 음악의 대안을 찾아 우리 민족의 음악감수성이 살아 숨쉬는 고장을 찾아 다니며 그곳의 민중들이 지니고 있는 음악피를 자신의 몸에 수혈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체험을 바탕으로한 새로운 작품을 시도하였다. 그에게 있어서는 현실의 반영과 민족적 정서를 노래하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다. <밤>은 김남주 시인의 고발을 김대성의 정서로 음악화 한 것이다.

* 이건용의 <미아리>
현실을 그리는 노래이되 그것이 동시에 대중적일 수는 없을까? 그리고 더 가능하다면 우리의 고유한 정서가 배어 나오는 노래일 수는 없을까? <미아리>, <그렇지요>는 이를 위한 시도였다.